초창기(1935~1975년)
원로장로 강석교
1935년 1월 대신교회가 설립될 당시에 나는 계성중학교 1학년이었다. 아버지(강신창)께서도 계성학교를 졸업한(7회) 목사님으로서 목회를 하고 계셨지만, 나는 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지 아니하고, 대신교회를 나의 교회로 정하고 지금까지 서남교회 교인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서남교회에서의 70년 세월동안 부족하고 불충한 종이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감사하며 또 감사한다.
교회 설립이후 많은 목회자가 거쳐 갔고, 장로들도 많이 지나갔다. 모두가 귀한 사명을 받아 주의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열과 성을 다하여 충성한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사건도 적지 아니 하다. 이제 70주년을 보내고 지난 역사의 정리를 의뢰받아 필을 들고 보니, 오랫동안 거주하던 주택이 몇 해 전에 재개발되어 이사하는 과정에 관련 자료가 거의 소실된 점이 매우 아쉽다. 교회 연혁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서 입수한 자료와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초기 40년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하니,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앞으로는 실수를 거듭하지 아니하고, 평안한 가운데 든든히 서가면서 대구지역에서 모범된 교회일 뿐 아니라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서남교회로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로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주후 1934년 신정교회(서문교회)는 본 교회에서 원거리인 대명동과 내당동 일대에 산재해 있는 교인들의 수요집회와 새벽기도회 실시를 위해 기도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대명동 소재 초가 8간을 김명수 안수집사로부터 기증받아 예배장소로 사용하였다. 1년이 지난 후, 신정교회 당회에서 대명동 기도소를 교회로 승격하기로 하고, 1935년 1월 6일에 정식으로 분립하니 곧 대신교회이다.
서문교회설립 50년을 맞아 1962년 5월 21일 발행한, 서문교회 약사에 의하면, 분립 당시의 교세는 다음과 같다.
교인가정 90호, 교인수 362인(세례교인 93인, 유아세례 9인, 학습인 24인)
목사 김용규(서문교회와 겸임), 영수 윤성삼, 한상선
집사 김홍배, 서상훈, 박만출, 이의원, 박동태, 김명숙, 김경래, 이영생 유이매, 차영숙, 이옥선, 강소선
초대 담임 김용규 목사는 1895년 경산군 남산면에서 출생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영천군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1919년 만세시위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아 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목회에 전념하면서, 특별히 선교사 등 외국인들과 관련을 맺고, 일제의 조선침략의 부당성과 그 잔악성을 주지시키는 일에 몰두하였다. 1932년부터 4년간 신정교회(서문교회)에서 염봉남 목사와 동사목사로 시무하면서, 대신교회(서남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겸임하다가, 경남 진주읍교회로 전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대구 남산교회 목사로도 시무하였고, 1958년 산격동에 동우성로원을 설립하고 기독교인 가운데 무의무탁한 노약자를 돌보는 양로원을 경영하였다. 그는 평생을 목회와 민족운동과 육영사업에 몰두하다가 1968년 별세하였다.
3.1.제2대 담임 김봉도 목사가 부임하다.
김봉도 목사는 두 번째 담임목사이면서, 해방 후 제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하였다. 그는 1895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191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후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경산군 자인교회를 거쳐 대신교회 담임목사로 왔으며, 오랫동안 경북노회 서기로 봉사하다가, 1937년에는 노회장를 지냈다. 해방 후 1957년에는 대구형무소 교화과장을 역임하였다.
교회가 점차 성장해 감에 따라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의논되어, 정태성 장로(성창합판 창업주)의 소유 대신동 330번지 120평 대지에 터를 잡고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무렵 동산병원의 소유 대지인 남산동 160번지(현 위치) 소재 대지 80평을 동산병원장 별이추(Dr. Archibald. G. Fletcher) 씨로부터 기증받게 되었다. 이 부지에 1936년 5월 30일 함석지붕 단층 54평을 신축 완공하여 헌당하였다. 그 이후 교회 터와 안접한 백남채 장로(남산교회 장로, 동산의료원장을 역임한 백준기 장로의 부친)의 가옥 대지를 정규만 장로가 매입하여 교회에 헌납함으로 현재의 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초 예배당을 지으려던 대신동 부지는 가친(강신창 목사)이 매입, 주택을 건축하여 우리 가족이 주거하였다.
제2대 김봉도 목사가 부임하여 새 예배당을 건축 봉헌한 이후 , 1936. 12. 6. 김봉도 목사 위임, 조용해 김홍배 장로장립, 서상훈 집사장립식을 가졌다.
조용해 장로는 서문교회 출신으로 장립 당시 연세가 많은 노인이었으며, 김홍배 장로는 초등학교 교원으로 우리 교회 초대장로로 시무하다가 중간에 중국(만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귀국하여 1950년에 다시 취임하였으며, 1953년 서머나교회(서현교회)로 나갔다.
1939년 9월 1일 박문호 이우항 손영균 장로가 취임하였으니, 세 분 모두 다른 교회에서 장로 장립 받은 자로서, 박문호 장로는 의성지방에서, 이우항 장로는 서문교회에서 우리교회로 이명왔다.
1942년 3월 1일 제3대 담임 주낙서 목사가 부임하다.
주 목사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일제 말엽 우리 교회에서 시무할 때 일제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1944년 울릉도로 목회지를 전임 후, 동년 12월에 설화(雪禍)로 순교하였다.
1944년 3월 1일 제4대 담임 신후식 목사가 부임하다.
신 목사는 1905년 경북 청송군 복동에서 신경한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계명대학교 학장과 명예총장을 지낸 신태식 장로는 그의 동생이다)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대구로 나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마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목사 안수 후 대구지방의 목회자, 대구중학교 교장, 신명여자고등학교 교장, 계성고등학교 교장 등의 교육자와, 경북노회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100세를 넘긴 연세로 미국에 살고 있다.
1945년 3월 1일 제5대 담임 이영식 목사가 부임하다.
이 목사는 1894년 성주군 금수면에서 태어 났으며, 계성학교와 일본 고베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우리 교회에 시무할 때부터 목회와 더불어 학교설립을 계획하더니, 나중에 맹아학교를 비롯한 특수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가 대구대학교로 발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움추렸던 교회가 생기를 찾고, 많은 교회가 새로 세워졌다. 우리 교회도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였다.
이제 60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일제시대에 겪었던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정서를 말살하려고 신사 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의 정책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으며,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38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의 악랄하고도 교묘한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일제는 더욱 강력하게 전국의 교회를 대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니 대구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달성공원에 신사(神社)를 지어놓고,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비롯한 애국 시민들을 강제로 모아, 소위 천조대신에게 절하게 하고, 학교에서도 조회 시간에 동방요배를 시켰다.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움추렸던 교회가 생기를 찾고, 많은 교회가 새로 세워졌다. 우리 교회도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2세를 교육하는 학교와, 유일신 여호와를 경외하는 교회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였다. 대구의 많은 교회에서 예배에 앞서, 일본 천황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예배를 시작하였다. 대신교회도 이에 참가하였고,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나도 동참하였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라는 첫 계명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 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 하신 2계명을 범한 죄인이다.
다니엘은 왕이 내리는 진수성찬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계속하였으며, 엘리야는 아합왕과 이세벨의 위협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아니 하였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자비하신 주님께 나의 잘못과 죄악을 고하오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보혈의 은혜로 사하여 주옵소서. 아울러 서남교회 모든 교우들에게도 용서를 구한다. 허물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당회의 일원으로 시무하였고, 지금도 원로장로라는 위치에 있으나, 돌아보면 자랑스러운 일은 적고, 부끄러운 일이 더욱 많은 것 같다.
1946년 5월 1일 김봉도 목사가 제6대 담임목사로 다시 부임하다.
동년 5월 12일 교회명칭을 “서남교회”로 개칭하였고, 김교연 장로장립, 김상보 김용태 장로가 취임, 윤성삼 진기화 김명한 홍관식 이남진 황윤식 집사가 장립하였다. 김상보 장로는 타교회에서 이명 왔고, 김용태 장로는 청도에서 대구로 이거하여 우리교회 장로로 취임하였으니, 그 아들은 김영찬 장로이고, 그 손자는 김창곤 장로이다.
1948년 3월 이의원 정규만 장로장립하다.
이의원 장로는 서문교회에서 분립 때 서리집사로 대신교회에 왔으며, 재임 시 당회서기를 맡아 봉사하기도 하였으나, 1958년 장로신임투표에서 낙선하여 그 가족 등과 함께 대신교회를 만들어 우리교회를 떠났다. 정규만 장로는 약전골목에서 활신당한약방을 경영하면서 교회에 많이 봉사하였다. 그러나 본인의 임마누엘파 신학교 재학이 문제가 되어, 교회 내부의 의견대립이 심화되어 1953년 서머나교회를 만들어 본 교회를 떠났으니, 그 교회가 지금의 서현교회이다.
1948년 7월 1일 제7대 담임 최재화 목사가 부임하다.
최 목사는 1892년 선산군 해평면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법과에 유학하기도 하였다. 그는 3·1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산동성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산강노회에서 목사장립 하였으며, 귀국 후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1933년 예배당을 신축하였으니 현재 약전골목에 있는 문화재 건물이다. 이후 부산진교회에 시무 중 우리교회의 청빙을 받아 제7대 담임목사로 있는 동안, 1949년 4월 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5회 총회(새문안교회)에서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49년 5월 15일, 교회설립 15주년을 맞아 예배당 24평을 증축하여 헌당하면서 최재화 목사 위임식과 박화준 강상문 집사 안수식을 거행하다.
이 날 예식은 경북노회 위임국장 강신창 목사가 위임식을 집례하고, 총회장이자 당회장인 최재화 목사가 안수식을 집례하였으며, 구체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기도-김용태 장로, 찬송-94장, 헌금기도-정규만 장로, 찬양-찬양대(여호와를 찬양해), 설교-명신홍 목사, 권면-최종철 목사(목사에게), 김정오 장로(교우에게), 이원우 목사(장립집사에게), 독창-강숙희, 교회약사 소개-이의원 장로, 증축보고-김교연 장로, 열쇠봉정-건축위원, 기념품 증정-김홍배 장로, 축전 축분 소개-김홍배 장로
1950년 3. 1. 김홍배 유재환 장로가 취임하다.
김홍배 장로는 우리교회 초대 장로로 시무 중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하였고, 유재환 장로는 고령 안림교회에서 이명왔으며, 그의 여식은 동로교회 유태일 권사이고, 사위는 김수관 장로이다.
1951년 3월 강상문 김정만 박화준 홍관식 장로장립, 김명한 집사가 장립하다.
김정만 장로는 동산병원 직원이었으며 그의 부인은 배분선 권사이다. 박화준 장로는 서문교회 출신으로 서머나교회로 나갔다가 다시 서문교회로 돌아갔다. 홍관식 장로는 장립시 연세가 많은 노인이였는데, 아들은 홍병섭 장로이고 손자는 홍덕원 목사이다.
1952년 7월 12일 대구시 남산동 569번지 소재 기도소를 “남부교회”로 분립하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난민 성도들이 남부기도소에 모이게 되어, 기도실을 확장하여 새로운 교회로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7월 12일 하오 3시에 당회가 예배당 사무실에서 회집되어(회장 최재화 목사, 회원 박화준, 이의원, 김교연, 유재환, 김용태, 김상보 장로) 남부기도실을 남부교회로 분립을 허락하는 동시에 동년 7월 22일에 소집되는 경북노회에서 인가를 얻도록 청원하기로 가결하였다. 강상우 목사(임시)를 파견 시무케 하고, 당회장은 최재화 목사가 겸임하였다. 이때의 분립상황은 세례교인 27명, 학습교인 30명, 원입교인 52명, 유년주일학생 150명, 가정 수 43호, 집사 6명, 권찰 5명이었다.
1952년 7월 12일 대구시 남산동 569번지 소재 기도소를 “남부교회”로 분립하다.
6·25전쟁으로 많은 피난민 성도들이 남부기도소에 모이게 되어, 기도실을 확장하여 새로운 교회로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7월 12일 하오 3시에 당회가 예배당 사무실에서 회집되어(회장 최재화 목사, 회원 박화준, 이의원, 김교연, 유재환, 김용태, 김상보 장로) 남부기도실을 남부교회로 분립을 허락하는 동시에 동년 7월 22일에 소집되는 경북노회에서 인가를 얻도록 청원하기로 가결하였다. 강상우 목사(임시)를 파견 시무케 하고, 당회장은 최재화 목사가 겸임하였다. 이때의 분립상황은 세례교인 27명, 학습교인 30명, 원입교인 52명, 유년주일학생 150명, 가정 수 43호, 집사 6명, 권찰 5명이었다.
1953년 1. 11. 서현교회 분립하다.
교회가 최재화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그런대로 지내는 가운데 이의원 장로가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정규만 장로가 대구신학교(임마누엘파)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문제 삼아 바르게 지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이였다. 이에 대해 이 장로의 의견을 찬동하는 쪽과 정규만 장로를 옹호하는 편이 생기게 되었다.
또 한 가지는 당시의 여전도사로 정남희 씨가 있었다. (교인들은 그를 정 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떤 일로 당회장 최재화 목사가 정 전도사를 징계하였다. 이 일로 정부인을 동정하는 편이 생겼고, 이들은 담임 목사를 배척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발단이 되어 교회안의 크고 작은 일에, 당회로부터 평교인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양분되어 어려움을 겪던 중, 최재화 목사를 배척하고 정남희 전도사와 정규만 장로를 옹호하는 교인들이 1953년 1월 첫 주일부터 남산동에 있는 진기화 집사의 공장을 예배처소로 정하고, 서머나교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 때 본 교회를 떠난 교인은 장로 10명중 5명(박화준, 김교연, 정규만, 김홍배, 김상보)을 비롯하여 전체 교인의 반수 정도였다. 그 여파로 교회가 편안하지 못한 가운데, 당회장 최재화 목사도 결국은 사면하게 되었다.
1953년 12월 1일 제8대 담임 김삼대 목사 부임하다.
김 목사는 체구가 비대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1953년부터 56년까지 노회 서기를, 1957년에는 경북노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6월 1일 제9대 담임 강인구 목사 부임하다.
강 목사는 1908년 5월 9일 경북 영주시 신천리에서 강석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3년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학교로 진학하여 당시의 최고학부를 졸업 후, 후진 양성을 위하여 고향인 영주 내매로 내려와 보통학교 교사로 12년 근무하다가, 다시 평양으로 가서 1942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동노회 금호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사안수를 받았다.
강 목사는 아담한 체구였지만 누구보다 강인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이었다.
금호교회에서 영천제일교회를 거쳐 1954년 6월 1일부터 1969년까지 15년간 제9대 서남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였다. 부임 초기에는 대체로 교회가 평온하였으나, 점차 목사 부인과 모 권사가 당회 일에 깊이 간여하며, 당회의 결의를 번복하여 혼란이 일으키고, 당회장 직권으로 장로를 제명하는 등의 무리한 일로 결국은 전교인이 날인한 사면권고문이 노회에 접수되어, 노회의 전권위원이 나와서 수습결과 사면하였다.
1954년 1월 2일 김이경 장로 취임, 김동운, 강석교, 남석룡 집사 장립하다.
김이경 장로는 상주에서 이명 왔으며, 여식은 김영자 권사, 사위는 남석룡 장로, 외손자는 남창수, 광수 집사이다.
1956년 5월 31일 박동수 김동운 강석교 남석룡 장로장립하다.
박동수 장로는 군위 출신이며, 여식은 박경희 권사, 사위는 김영찬 장로, 외손자는 김창곤 장로이며, 대신교회로 났다가 다시 서현교회로 이명 하였다. 김동운 장로는 서머나교회 분리 때 나갔으며 부인은 한신덕 권사이다.
강석교 장로는 1921년 고령 안림에서 강신창 목사와 전신애 권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계성중학교 1학년때, 대신교회 창립예배에 참석한 이래 현재까지 서남교회를 섬기고 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원, 장학사, 교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계명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중간에 신명여자고등학교 서무과장으로도 봉직하였다. 1942년 박세원 장로의 장녀 박병주 권사와 결혼하였으며, 경북노회 아동부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슬하에 성구 장로, 윤구 목사, 현구 집사와 명희 은희 권사가 있으며, 1991년 11월 24일 우리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남석룡 장로는 1921년 경북 청송군 현동면 개일동에서 남정철 장로와 손인동 권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스가모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초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44년 김이경 장로와 선우신경 권사의 장녀 김영자 권사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창수 광수 집사가 있으며, 경북노회 장로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1년 11월 24일 원로장로로 추대되어 여생을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2005년 1월 별세하여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1958년 2월 20일 대신교회 분립하다.
당시 교회 헌법에 3년마다 장로 시무투표에 대한 규례가 있었다. 교회 안에서 이에 해당되는 장로에 대해 시무투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해당 장로 본인도 투표를 받겠다하여 당회에서 이를 결정하고 시무투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이의원 장로가 시무투표에서 낙선되어 그 가족과 그를 따르는 10여 명이 본 교회를 떠나, 남산초등학교 남쪽 민가에 대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때 당시의 교회 관련 서류 일부도 함께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11월 18일 김성도 박하운 홍병섭 황영식 장로 장립, 배분선 강소덕 권사 임직하다.
김성도 장로는 1923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 돌아가시고 모친 정인순 성도의 보살핌 아래 남산초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서울 소와공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만주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귀국하였다. 1944년 윤무선 권사와 결혼하였으며, 경북노회 부노회장을 지냈다. 슬하에 선우 장로가 있으며, 1995년 1월 8일 원로장로로 추대되어 여생을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1997년 별세하여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박하운 장로는 박문호 장로의 친척으로 의성이 고향이다. 오랫동안 재정부장을 맡아 어려운 교회 살림에 수고를 많이 하였다. 당시 춘궁기에는 교회도 보릿고개를 당하여 교역자 사례비와 운영비가 부족한 형편이었다. 우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홍병섭 장로는 홍관식 장로의 아들이며 부인은 하금도 권사이고, 슬하에 홍덕원 목사와 여러 형제가 있다. 1970년대 서울로 이사하여 생존 중이다.
황영식 장로는 초등교원으로, 강인구 목사가 영천에서 우리 교회에 부임할 때 같이 와서 서남교회를 섬기다가, 강 목사 시무 때, 삼덕교회로 이명 하였다.
1963월 10월 24일 곽원순 김영찬 장로 장립하다
곽원순 장로는 1917년생으로 계성중학교와 동경물리학교 수학과를 졸업 후, 1962년 4월부터 1966년 11월까지 계성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김영찬 장로는 1923년 청도에서 김용태 장로와 김성조 집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성상업학교를 수료하고 경성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폐교조치로 졸업하지 못하였다. 경북노회에서 유년주일학교 교사 20년 근속상을 받았다. 1942년 박동수 장로의 여식 박경희 권사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창곤 장로가 있다. 1986년 별세하여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1970년 1월 6일 제10대 담임 권영관 목사가 부임하다.
권 목사는 삼덕교회 부목사를 지냈으며, 최근까지 대구남노회 고령지방에서 목회하였다.
1971년 1월 5일 제11대 담임 김기동 목사 부임하다.
김 목사는 대구사범학교, 장로회신학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우리 교회에서 문현중앙교회로 전임하였다.
1973년 1월 1일 제12대 담임 이종화 목사 부임하다.
이 목사는 1926년 청도군 운문에서 이춘중 목사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청구대학 법과와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안노회에서 목사장립 후,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선산군 옥성면 초곡교회로 전임하였다. 1986년 흰돌교회를 설립하였고, 1998년 별세하였다.
1974년 1월 6일 김우봉 손태익 하종국 집사장립하다.
1974년 1월 4일 제13대 담임 김태규 목사 부임하다.
김태규 목사는 1975년 5월 18일 경북노회 위임국장 박맹술 목사의 집례로 위임하였으며, 1976년 4월 우리교회를 사임하고 청주대농교회로 옮겨 갔다.
1975년 5월 18일 교회설립 40주년 기념행사와 김태규 목사 위임, 김우봉 장로 장립, 이팔술 집사 장립, 박병주 이산이 권사 임직, 김기순 오말분 박임순 명예권사 추대식을 가지다.
김우봉 장로는 1915년 왜관에서 김억만 영수와 유정분 성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한금례 권사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안대 권사와 화언 성도, 화윤 장로가 있으며, 1982년 별세하여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초창기 역사에 부언함은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가 없는 사이사이에 신명여자고등학교 교목으로 있던 김상백 목사와 박정식 목사가 강단을 지켜 주었으며, 김재홍 목사도 여러 달 동안 설교 목사로 예배를 인도하였다.
1935년에 설립된 서남교회는 해방 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대구에서 7처교회로 불려지는 영향력 있는 교회였다. 역대 교역자들이 교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였고, 교회의 위치 또한 도심에 가까이 있어서 새로운 교인의 유입이 많았다. 그러나 해방과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교회 내부에도 많은 문제가 생겨나 교회가 분리되고, 목회자가 뜻을 펴지 못하고 떠나가며, 교인들도 다른 교회로 옮겨가는 불미한 일이 많았다.
1935년 교회 창립 때부터 1975년까지, 4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의 역사에 대해 직접 겪었거나 아는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70년사 편찬을 맡은 남택수 장로가 오래 전부터 수차례 원고제출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자료가 미비하고, 기억이 희미하여 온전하게 서술하지 못한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러는 남 장로가 보완하기도 하여 겨우 이 정도로 마무리하였으니, 혹시 잘못 된 내용이 있다면 늙은이의 정신이 혼미하여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한 결과이니, 널리 양해하시고, 앞으로 수정하고 보완하기 바란다.
1978년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여 헌당하고 점차 안정된 우리 교회가 이제는 지난날의 아픈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리고, 창공을 향해 훨훨 날아오르는 젊은 독수리와 같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일취월장 년년세세 무궁무궁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중흥기(1976~1992년)
명예원로목사 이상신
창립에서 제13대 담임목사까지
1934년 1월에 서문교회의 기도소로 시작하여 ‘1935년 1월부터 독립된 교회로서 출발하였으며, 제2대 김봉도 목사가 부임하여 1948년까지는 초창기로서 조용한 가운데 성장하다가, 제3대 주낙서 목사로부터 제4대 신후식 목사, 제5대 이영식 목사, 제6대 김봉도 목사까지는 당회장이 단명으로 물러났고, 1948년에 제7대 최재화 목사가 부임하여 5년간은 목사배척 때문에 시끄럽게 지냈으며, 제8대 김삼대 목사가 6개월 만에 사표를 냈고, 제9대 강인구 목사가 부임하여 14년간 시무했으나, 본인 말로는 3년간 조용히 목회 했으나, 그 다음 10년간은 분쟁 때문에 영일이 없이 지내다가, 노회의 중재로 사임하고 난 다음, 제10대 권영관 목사가 부임 후 1년 만에, 제11대 김기동 목사가 1971년 1월에 부임 후 2년 만에 물러나고, 1973년 1월에는 제12대 목사라고 교회연혁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실상은 타 교단 목사로 당회장 권한 없이 임시로 1년 있다가, 제13대 김태규 목사가 1974년 4월에 부임, 2년간 시무하는 중에도 목사 배척이 시작되어 옹호파와 알력으로, 목사가 견디지 못하여 1976년 초에 청주 대농교회로 가버리니, 옹호하던 교인들이 타 교회로 흩어져 가고나니, 교세가 240명에서 반수로 줄어들고, 남은 교인들의 원성이 일어나자 배척 주동 장로 중 한 사람은 장로사표를 내기도 하였으나 후일에 반려되었다. (76년 5월30일 당회록 참조)
제14대 이상신 목사 부임과 예배당 건축
후임 목사를 물색 중, 칠곡교회에 시무하는 이상신 목사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은 후, 1976년 7월 25일 당회에서 위임목사로 청빙키로 결의하여, 8월 15일의 공동의회에서 총투표 108표에서 가표 96표 부표 12표로 이를 가결 하였다. 제14대 목사로 이상신 목사가 부임하여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교회가 중흥기(中興期)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회의 분규로 교세가 240명에서 120명으로 감소하여 교회 분위기가 소침되어 있어, 부임 초 심방을 강화하여 교우 가정 사정을 모두 살핀 후, 교회 중흥 사업의 첫째로 노후(老朽) 퇴폐된 교회당 건축을 독려해가며, 년말 성탄절을 기하여 학생회 “칸타타의 밤” 음악행사를 성대히 거행하여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여전도사 박태석씨를 임명하여 함께 교인가정을 열심히 심방하여 교인들의 신앙안정에 힘을 쏟았다.
1977년 1월에 부산 소정교회 김두봉 목사를 초청, 부흥회를 실시하여 영적 각성을 시킨 다음, 제직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부흥회 마지막 날 새벽 기도회를 하고 있는 중에, 강사목사가 설교를 마친 후 기도하는 중에, 교회당 건축헌금을 하라는 감동이 왔는데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하며 본 교회 목사에게 물으니, 이 목사는 “성령의 감동이면 해야지요”라고 하여, 급히 작정헌금 용지를 백지로 준비하여 분배 후 헌금을 하게 되었다. (이 내용은 별기 “교회 건축시 숨은 이야기들”이란 기록에 있음)
교회 건축 준비를 위하여 담임목사와 함께 건축위원들이 부산, 대전, 서울 지역의 새 교회당을 두루 살핀 다음, 이 목사가 구상하여 고려건축 설계사무소 이우일 장로에게 맡겨서 설계도면이 나오게 되었다. 건축 장소를 현재의 위치는 진입로가 협소하여 남쪽 지역으로 옮길 생각으로 장소를 물색하여 적당한 곳을 찾았으나, 현 교회당 대지 매각이 여의치 않아, 2개월을 두고 기도 하였으나,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아 현 위치에 건축키로 작정하였다. 1977년 7월 기공예배를 드리고, ‘78년 10월 30일 예배당을 지하 40평, 1층 120평, 2층 130평, 3층 40평, 옥탑 6평, 종각 5평, 총 346평을 완공하게 되어, 혹이 말하기를 120명 교인으로서는 기적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계속하여 ‘79년 10월 10일 부속건물(여전도사 사택 및 관리집사 사택) 18평을 짓고, ‘80년 10월 31일에는 목사관 2층 양옥 37평을 완공하여 ‘80년 11월 16일에 성전 봉헌식을 올렸다.
예배당 화재를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
1980년 11월 16일, 신축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리고 겨울철을 맞은 대예배실은 춥고 썰렁하였다. 원인은 천정이 너무 높아, 난로를 몇 개나 피워도 따뜻하지 않고, 따라서 난방비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예배실 출입문이 나무로 되어있어, 이를 강화 유리문으로 교체하면 미관도 좋고, 관리도 용이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박수임 권사(당시 집사)가 유리문 값을 헌금하겠다고 하여, 이를 당회에 부의하였으나 일부 장로가 동의하지 아니 하였다.
1987년 11월 17일 오전 8시 10분경, 담임목사 아들이 동산병원으로 출근하고자, 교회 정문을 지나면서 예배당을 쳐다보니, 지붕위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급히 사택으로 뛰어와서, “교회에 불 났어요”라고 알리고, 교회 앞에 서 있던 낯선 사람이 생각이 나서, 뛰어가 그 청년을 붙잡으니, 그가 곧 방화범이였다. 소방차 두 대가 와서 바로 진화하는 동안, 우리 가족들이 교인들에게 급히 전화하니, 일터에서 가정에서 연락받은 교인들이 가까운 집은 달려오고, 먼 곳은 택시를 타고 속속 도착하여, 화재 뒤처리를 하였다.
방화범은 십대의 정신착란환자였는데, 전날 경사로 쪽 첫째 창문으로 들어와서, 난로를 피워놓고 자고나서, 아침에 강대상과 성찬상 등을 뒤져 보았으나, 훔쳐갈 만한 물건이 없어 몇 군데에 불을 붙였다고 하였다. 실제 화재가 일어난 곳은, 북측 앞쪽의 첫째와 둘째 창문의 커텐을 타고 올라간 불길이 벽과 천장 일부를 태웠으며, 진화시 뿌린 물줄기가 전자오르간과 성찬상 등을 흥건히 적셨다. 범인은 강대상 안에도 쏘시개를 만들어 불을 붙여 넣었으나, 바로 문을 닫아 조금 타다가 저절로 꺼져 버렸고, 뒤쪽 온풍기 옆에도 불을 붙였으나, 바로 옆에 있던 비닐석유통에는 불이 붙지 않아, 대형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화재 후 예배당 내부를 대폭 수리하였으니, 천정을 1m 가량 낮추고, 시멘트 마감 후 페인트로 칠한 벽면 전체를, 단열재와 조각목을 붙여 리모델링하였으며, 일부는 타고 그을린 출입문을 최신식 강화유리문으로 교체하니, 이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예배당이 되었다.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감사할 따름이다.
종각 추락사건
1985년 7월 어느 날 오전 8시, 당회실에서 직원기도회를 마치고, 박병규 관리집사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려 놀라서 급히 나갔다. 박 집사도 관리동에서 매우 놀란 표정으로 뛰어 나오면서 서로간에 “무슨 소리입니까?”하며 살펴보니, 종각위의 남측 샷슈벽이 태풍에 견디지 못하여 떨어져 내려와, 관리동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직립(直立)으로 걸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유리가 끼워져 있는 그 벽채의 무게가 대단히 무거웠을 터인데, 직하로 떨어졌으면 교회 바로 앞의 다세대 주택에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또 조금 비켜가서 그 옆집에 떨어졌어도, 큰 사고가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으로 남쪽으로 조금 날아가다가 우리 교회 관리동 계단에 떨어진 것이다.
지금 관리동 옆 작은 창고 뒤편 담 위에, 앞집 소유의 커다란 가죽나무 가지가 담을 넘어 교회 쪽으로 뻗어 나와, 평소에 불편을 많이 느꼈다. 그러나 주인이 이를 알고도 그대로 두고 있으니, 만약에 우리가 넘어온 가지를 자르면, 이를 구실로 항의 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는데, 샷슈벽이 그 나무 가지 위에 떨어지면서 나무를 자르고, 옆으로 튕겨 나온 곳이 관리동 계단이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솜씨가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병규 집사가 금방 거기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지 마자,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또한 온 교우들이 교회를 위한 기도의 응답이 아니겠는가.
서남의 모든 교우들은, 우리 교회에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에 응하도록, 항상 분발하여 교회 성장을 위해 일로매진하기를 기원하다.
희망원교회 돕기
1983년도, 우리 교회 청년 한 사람이 정신장애로, 그 집 앞에서 시립 희망원에 강제 입소되었다. 주일 오후, 청년회원들과 그 곳에 심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희망원교회 정 전도사의 요청을 받고, 격주로 주일 오후에 청년들과 함께 찬양예배를 인도하고, 정성으로 준비한 다과를 나누어 주었다. 신체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그들이지만, 진지하게 예배하고,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방문하는 목사와 청년들도 보람스러웠다.
몇 년후 겨울, 우리 교회 유년부와 학생회를 거쳐 대학생이 된, 착하고 어여뿐 한 여청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 부모와 교인들의 슬픔은 매우 컸으리라. 그럼에도 그 부모(권영근 집사 김규순 권사)는 조위금 전액을 주의 일에 쓰고자 하여, 피아노와 대형 벽시계를 구입하여, 희망원교회에 헌납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희망원교회 돕기는 20년이 넘는 오늘까지 이어져, 지금도 청년회원들이 매월 1회 방문하고, 남여 전도회도 가끔씩 함께 돕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1980년대의 다른 일들
1983년 6월에 들어, 특수전도를 위하여 마리아 여전도회와 대구 교도소 장기수들과 결연을 하여, 매월 12~15명을 찾아 신앙지도와 격려 및 위로회를 실시하였으며, 또 대구 희망원 교회를 청년회와 결연하여, 월 1회씩 방문하여 예배와 오락지도 및 위문품을 전달했고, ‘83년 8월에 들어 강원도 신림소재 가나안 농군학교 부설 복민학교에, 1차(2일~5일) 여전도회 회원이, 2차(8일~12일) 당회원 및 피택 장로들이 입교하여 개척 정신을 연마토록 하고, ‘83년 7월 31일에는 전도부흥사 박종무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열을 일으켜 교회 주변 가정들 전도에 힘을 쏟았다. ‘83년 4월 9일에 선교원을 개설하여 교회 주변 가정의 어린이 교육 및 그 부모들의 전도에 힘을 쏟고, ‘84년 7월 노회 내의 어려운 농촌교회를 돕기 위하여, 다부동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쓰러져 가는 교회를 일으켜 세워 발전시켰다.
1985년 11월에는 서울 수유리교회 윤덕수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가져 교회 부흥의 힘이 되기도 했고, ‘86년 2월 9일 당회에서는 성전증축을 결의하여 지하층을 확장하여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지상에는 부목사 사택을 건축해서 부 교역자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87년 12월 27일에는 부산 성덕교회 시무하는 남주석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교인의 영적 성장을 도모 하였다.
1989년 1월에는 최일호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열의를 돕기 위하여 부흥회를 열어 전도에 힘썼으며, ‘90년 1월 22일~25일 까지는 피종진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의 안목을 세계적으로 넓히고, 심령의 바른 성장을 도모 하였다. 이 때에 서울에 이주하여 살던 모 집사가 개인적으로 담임목사에게 소나타 승용차를 기증하여, 은퇴할 때 까지 12년간 이용했다.
새빛교회 개척에 관하여
1991년에는 그동안 온 교인이 정성을 모아 준비한 개척교회를 설립하였다. 80년대 중반부터 연말 재정결산 결과, 잔여금이 생겨나 “교회발전기금”이라는 항목으로 적립하여 1990년에 이르러서는 교회의 최대 사명인 교회 개척(새끼치기)사업에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당회와 제직회의 결의를 거쳐 1991년 10월 27일 개척교회 설립예배를 드렸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남노회 재단이사장의 명의로 수성구 지산동에 2층 건물 45평을 7천만원으로 임대계약하고 교회 명칭을 새빛교회라 하였다.
교역자는 청도시찰 내에 목회하고 있던 박경서 목사를 인선하여, 월 70만원 연 14개월의 생활비를 3년 보장하기로 하였다.
이는 서남교회 설립이후 순수한 교회개척은 처음이기 때문에 매우 뜻 깊고 보람 있는 일이였다. 모든 교인이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여전도회에서는 예배당 창문 커텐과 의자 방석을 헌납하고, 교인들이 기타 필요한 물건을 헌납하였으며, 청년회와 중고등부에서 단체로 개척교회를 방문하여 집회를 도왔다.
박경서 목사는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대출을 받고자 모교회에 보증을 부탁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교회 이전과 신축의 과정에 모교회와 충분한 협의가 없어서 서남교회에서는 칠곡으로 교회를 옮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섭섭함이 있었던 것 같다. 결국은 고리채를 빌려 건축을 완공하고, 교회 발전을 위해 힘쓰다가, 천정이 누수 되어 보수작업을 위해 지붕에 올라갔다가 그만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 3개월간 입원 치료하고 돌아오니 교인은 거의 없고, 빌린 돈의 이자만 늘어 결국은 건물이 차압 경매되었고, 본인은 면목이 없다며 서울로 이주하고 말았다.
이로써 새빛교회의 개척사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회가 결의하고 시작한 교회개척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담임목사가 교체된다 하더라도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바뀌어서 아니 된다. 현재 서남교회에서 해외 선교사를 지원하고, 필리핀에 예배당을 세우며 국내의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업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물질과 기도로 지원하여야 한다.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는 이런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바란다.
중국에 교회를 세우다
1991년 12월 1일 주일, 김말선 권사의 여동생 한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는 중국 길림성에 살고 있는데, 그 곳의 사정과 교회에 대해 많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 당시 중국은 홍위병난이 지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처소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서남교회에서 예배당을 지어주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하였다. 당회에서 중국교회 지원을 결의하고, 한화 150만원을 그 아들 박명수 씨에게 주었더니, 그들이 귀국하여 40여 평의 아담한 예배당을 신축하여, 현지 삼자교회 목사님을 초청하여 헌당예배를 드렸다는 연락을 보내왔다.(나중에 50만원을 추가 지원하였음)
이상신 목사 은퇴
1992년 12월 27일 당회에서. 이상신 목사는 ‘93년과 ‘94년 3월 노회에 서남교회 전도목사로 청빙하며, 명예원로목사로 추대하기로 결의 하였으나, 이 목사는 1월 첫 주일부터 강단설교를 장성순 목사께 일임하고 당회장권도 행사하도록 일체를 다 맡겼다. 그러나 1993년 1월 당회에서 전년도 12월 당회 결의를 번의하여, 명예원로목사 추대를 취소하기로 결의하였음으로 이상신 목사는 노회에 제출한 위임목사 사면서를 회수하고, 신임 예정자 장성순 목사의 청빙서는 노회에 제출된 상태로, 3월 노회에서 문제가 되어, 노회 본 회의에서 중재안이 나오기를 남시찰회에 일임하여 이상신 목사 명예원로목사 추대예배를 드리고, 위임목사 사면서를 접수한 다음 장성순 목사의 청빙서를 접수하여 허락하도록 하라는 결의가 이루어져, 급기야 ‘93년 4월 18일 오후 3시에 남시찰장 김찬헌 목사의 집례로 이상신 목사 명예원로목사 추대와 장성순 목사의 취임식이 이루어져 모든 문제의 해결을 보게 되었다.
나가는 말
말미에 부언하고자 함은, 역사란 사실을 기록하여 후대인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몇 가지를 적는다. 뒤돌아보면 1934년에서 1993년까지의 60년간의 서남교회 연혁을 살펴보면, 제14대까지의 목사 중 다수의 목사들이 부임 후 1년 또는 2년 이내에 교체가 되었으나, 제7대의 최재화 목사가 5년 시무하고, 제9대의 강인구 목사가 15년, 다음 제14대의 이상신 목사가 17년간 시무를 했다. 그런데 장기간 목회를 한 목회자 때에는 언제나 교회가 시끄러웠다. 이 목사가 부임한 이후 목회하는 동안 교우들이 찾아와서 대담한 내용들 몇 가지와 대조해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1) 김기순 권사 : 목사님 오시기 전에는 제직회 때마다 너무 큰 소리로 분쟁을 해서 제직회가 있는 주일은 교회 오기가 겁났는데 목사님 오신 이후에는 조용해 졌습니다.
(2) 안분이 집사 : 제 아들 이득가를 어릴 때에 새벽기도 때 마다 업고 와서 치마 밑에 묻어두고 기도하기를, “우리 덕가는 후일 목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했는데, 교회가 시끄러워지더니 최재화 목사님을 강단위에 장로들이 올라가서 북치듯 두들겨 패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기도내용을 바꾸어 “하나님 득가는 목사 안시킬렵니다”고 했더니 그 아이가 커서는 교회에도 안나가고 저렇게 사업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울먹였다. 이득가 씨는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마음으로 우리 교회에 1997년부터 수년간 계속 매월 장학금을 보내오고 있다.
(3) 강인구 목사 : 이상신 목사가 1976년 9월에 부임하여 ‘77년 설날을 앞두고, 장로들에게 제의하기를 “우리교회가 이제 새롭게 되어 발전하여 복 받으려면, 이전 우리교회가 섭섭한 감정을 갖게 한 분들과 화해가 필요하니, 제일 먼저 교회 옆에 계시는 강인구 목사님께, 설날 쇠고기를 좀 사서 당회원들이 세배를 가십시다”고 했더니 아무도 가겠다는 분이 없어(강석교 장로는 그 당시 휴무중이어서 당회에 출석하지 않다), 결국 이 목사 혼자 찾아 갔는데, 그때 강인구 목사님 말씀이 “내가 서남교회 부임하여 한 3년간은 제대로 목회했고, 나머지 10여년은 장로들과 싸움을 하는 가운데 보내며, 교회를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결국 노회 수습위원이 와서 중재하여 그만 두었습니다.”고 하였다.
(4) 이상신 목사는 계획대로 은퇴기한이 가까워지면서, 스스로 주택도 마련하고 은퇴 후 생활비는 총회연금으로 충당하기로 하고(사실 연금은 본인과 교회가 반반씩 부담 했으니 교회 시무 혜택으로 볼 수 있음), 퇴직금은 관계 법령에 따라 마지막 해의 월 사례비에 시무연한 17년을 곱한 금액과 마지막 1년 안식년을 보너스로 하여, 17년간 성장시켜온 교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데 재정 압박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서남교회에 일체 출입을 하지 않은 사이에, 당회와 제직회에서 명예원로목사 문제로 시끄럽다가, 4월 8일 명예원로목사 추대가 끝이 나고서 교회가 조용하였다.
이상 몇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건데, 서남교회는 설립 후 담임목사 14대가 지나는 동안, 최재화 목사 5년, 강인구 목사 14년, 이상신 목사 17년 등 ,목사가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는 때마다 일관되게 교회가 시끄러웠다. 생각건대 그 원인은 장로들이 교회의 주권행세를 하여, 목사배척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교회 성장은 멈추고 혹은 교세가 움츠려 들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얻은 교훈은, 목사와 장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부르셔서 그의 교회를 먹이고 감독하여 구령사업을 함께 도모하여 교회를 키우라고 지운 임무이다. 그러므로 첫째는 목회자가 애양정신(愛羊精神)이 있는 한, 장로들은 그 목사를 열심히 도와나가면 교회는 언제나 평화롭고 발전하여 가는 것이니, 목사가 이단을 가르치거나 또는 파렴치범이 아닌 이상은 배척운동을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며, 둘째, 장로가 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좌지우지하게 되면, 먼저는 목사에게 매사에 도전하여 목사로 하여금 자신 있는 목회를 못하게 하고, 장로 상호간도 알력을 야기하여 교회가 평화롭지 못하고, 교인들에게는 불안감을 주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가 교회가 침체되거나 정체하게 된다는 사실을 교회사에서 철저히 배워, 우리 주님에게서 받은 소명을 충성스럽게 잘 받들어, 앞으로 무궁히 발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해 보았다.
성숙기(1993~2005년)
원로목사 장성순
기독교 역사를 더듬어 보면, 교회는 언제나 세상에서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숙명적이었다. 교회가 위축되어 있을 당시에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긴장감 때문에 자책과 진통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교회가 부흥되던 시대는 부패와 세속화 때문에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약점이 많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우리 서남교회는 일제시대의 수난의 걸음을 통과 하였고, 해방의 혼란한 시기와 6·25전쟁의 아픔, 교회적으로는 분열의 상처, 그리고 유신의 경직된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우리 교회는 시대적 아픔과 상처를 함께 겪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있는 서남교회에 이상신 목사님의 뒤를 이어, 1993년 1월 첫 주일에 제15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동안 전체적인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
“말씀은 들음에서 나며”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가운데 가장 큰 복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복이다. 성도는 말씀의 권능과 그 능력을 체험 하면서, 비로소 말씀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의 기적을 나타내게 된다. 설교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사이다. 서남교회 담임목사 부임이후, 어느 것 보다도 설교준비에 열심을 내었다. 그것은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며,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영성을 일깨워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말씀 준비에 심혈을 쏟았다. 특별히 우리 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치유 설교에 중점을 두었다. 그만큼 아픔과 상처와 원초적 불안이 있었다. 성도들의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기 전에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도회를 통한 내면의 치유
요즘 제일 많이 대두 되는 용어가 “미래(future)”라는 말이다. 이 미래를 좀더 연구하기위하여 “미래학(futurology)”이라는 용어가 생겼고, 2000년대 들어서는 미래 신기술, 미래우주, 미래교육, 미래가정, 미래사회, 미래교회, 심지어 미래대학까지 생겼다. 분명한 것은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면서도 그 시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성도 앞에 몰려있는 불안의 그림자와 예측할 수 없는 어두움의 영적 그림자들이 넘실거린다. 그러므로 미래의 영적 전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내일에 대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비전을 얻는 일과 그 비전을 향한 신실한 기도이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도 없이 심은 것들은 뽑히게 되고, 기도 없이 행한 일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서남교회의 금요기도회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자신을 향한 선명한 비전을 확인하고, 내면세계의 상처 아픔 분노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애통하는 기도를 통하여 마음의 독소가 빠져 나오고 감정이 깨끗하게 정화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은 사람 앞에서 웃을 수 있다. 치유 받은 영혼은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 성경공부를 통한 변화의 삶
교회를 가리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있는 지상교회는 독특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지상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특권만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평신도를 어떻게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제자훈련이을 선택하였다. 제자 성경공부는 지식을 위한 성경공부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평신도 정예화 훈련이다.
우리교회에서는 장로님들부터 제자 성경공부를 시작하였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둘러앉아 말씀을 상고하며, 마음에 품은 이야기를 표현할 때, 서로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교회의 크고 작은 일들도 쉽게 해결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초급, 중급, 고급반으로 갖추어진 과정을 위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장로님과 권사님도 지도자로 봉사하심으로, 가르치는 분과 배우는 분 모두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이 훈련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제자훈련을 하면서 느낀 것은 성도들이 애정의 소속감을 갖게 되고, 말씀을 통한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면서 성령께서 그들을 치유 하신다는 것이다. 대 집회에서 기대 할 수 없는 일들이 소그룹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구성원들이 마음을 열고 고민하는 문제를 함께 공유하는 분위기로 상호 깊은 인간관계를 갖게 되고, 사랑과 화목으로 묶어 놓는 것이다.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 지면서 감정의 교환이 이루어져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의 놀라운 변화는 곧 교회가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성경통독과 성경쓰기를 통한 신앙 활성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성도는 말씀을 듣고 읽고 말씀을 만나고, 말씀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말씀은 성육신된 말씀이며 예수님의 인격이며 예수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이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만이 생명이 있고 길이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에서는 6년째 매년 1월과 2월 사이에 성경통독 대학을 실시하고 있다. 말씀을 읽고 동시에 들으면서 모두들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다. 또한 성경쓰기도 함께 진행하여 많은 분들이 신약, 구약의 말씀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쓰면서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성경쓰기도 장로님들이 뜻을 모아 먼저 시작하여 봉헌하였다. 말씀을 깨달았을 때의 기쁨과 흥분은 물론이요, 육체의 질병도 나음을 얻는 은혜를 받았다. 교회에서는 정성으로 필사한 낱장을 고급스럽게 제본하여 필자에게 기증한다.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간증하는 말씀을 통해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성경쓰기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는 성도들이 영혼의 신령한 양식을 공급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역동성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눔이 있는 공동체
우리교회에서는 매주 목요일, 독거노인들과 소년 소녀 가장을 위하여 반찬을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또한 미자립교회 12곳과 18개의 기관을 지원하고 있다. 성도는 이웃이 형제, 자매로 보일 때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 말씀에서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네게 한 것 이니라” 라고 말씀 하셨다. 또한 바울은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였다.
이 의미는 나와 이웃의 관계가 그대로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연결되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과 더불어 이야기하고 주고받은 모든 관계를 주님은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 서남교회는 가능하면 많은 이웃에게나 어려운 교회에게 퍼 주어야한다. 내가 대하는 모든 교회와 이웃이 바로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선교를 위한 비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교회에게 위임하셨다. 지구상에 아직도 미전도 종족이 1,100종족이나 있고, 자기 말로 성경 번역이 안 된 부족이 2,700부족이 있다.
선교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 우리교회는 지금까지 필리핀, 러시아, 중동, 일본, 00국 등의 선교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선교비 지원 외에 단기선교단 파송, 예배당 건축, 장학금 지원, 현지 부흥회와 제직세미나 인도 등의 활동을 통해 세계선교에 이바지해 왔다. 특별히 지난 해에는 우리교회 부교역자로 7년간 시무한 양승만 목사 박경옥 사모를 동북아 지역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이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선교를 감당 하겠다는 의지와 출발의 신호이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되고 양적인 성장과 질적으로 성숙한 교회가 되어,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이 시대를 감당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줄로 믿는다.
서남교회의 나무 – 백향목(柏香木)
은퇴장로 남택수
우리 교회 마당에 커다란 나무가 있다.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바람이 부나 사시사철 언제든지 푸르고 싱싱한 모습으로 서남교회를 지키면서, 오는 이을 반가이 맞아 주고, 돌아가는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서남교회를 처음 찾아온 손님들이 맨 처음 만나는 것은 이 나무이며, 그들의 인사말도 “아! 나무가 참 크고 좋습니다”로 시작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출향성도들도, 변하지 않은 이 나무를 보면 더 없이 반갑고, 이 나무 아래에서의 추억과 그리운 얼굴들을 생각한다.
이 나무는 보았다. 오늘 새벽기도회에 누가 왔는지. 그리고 어느 집사님이 가장 늦도록 간절하게 기도하고 돌아갔었는지. 또 그 분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마음까지도, 이 나무는 짐작하고 있으리라.
인간은 항시 변한다. 어린이가 자라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며, 그리고 장성한 어른으로 바쁘게 살다가, 늙고 병들어 하늘나라로 간다. 이 나무는 서남의 가족들이 변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는 듯 하면서도 도무지 말이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친구가 된다.
이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75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강석교 원로장로님의 기억에 의하면, 1936년 5월 30일, 남산동 160번지(현 예배당 위치)에 함석지붕 54평의 새 예배당을 신축 봉헌하고, 타원형의 정원을 만들 때에, 지름 약 10㎝되는 5년 정도의 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또한 강성구 장로께서 국민학교 1학년 때(1950년), 교회 마당에서 찍은 사진의 배경에 나와 있는 이 나무의 크기로 보아, 당시 15~20년생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남교회에, 이와 같이 귀한 나무가 아름드리로 보존되어 있음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35년 교회를 설립하고, 지금까지 여러 분의 담임목사가 바뀌고, 몇 차례의 예배당 증축과 신축이 있었지만, 이 나무는 지금의 자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5년 10월, 나무박사로 불리고 있는 계명대학교 강판권 교수가 우리 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이 나무가 개잎갈나무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무의 자태가 무척 아름답다. 자태가 아름다운 것은 나무의 본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확보해주었기 때문이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함께 하는 일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 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 개잎갈나무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개잎갈나무는 침엽수강, 소나무과로서, 히말리아 북서부가 원산으로, 1930년경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나무의 수형이 아름다워 세계적인 미수(美樹)이다. 또 이 나무는 상록침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30m, 지름 1m에 달한다. 가지가 밑으로 처지면서 전체 나무 모양이 긴 삼각형으로 대단히 아름다워 세계적인 조경수이다. 나무껍질은 회갈색이고 얇은 조각으로 벗겨진다. 잎은 짧은 가지에서는 총생(叢生)하고, 새 가지에서는 1개씩 달리며, 길이 3∼4cm의 바늘모양이다. 꽃은 1가화로서 10∼11월에 암꽃은 연한 보랏빛으로 피는데 단지에 위를 향해 달리며, 솔방울은 타원형이고, 실편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음 해 10∼11월에 초록빛을 띠는 회갈색으로 익는다.
우리 나라에서는 개잎갈나무를 히말라야시더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대표적인 가로수는 히말라야시더였다. 히말라야시더(Himalayan cedar)는 개잎갈나무의 영어식 이름이다. 히말라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산 히말라야이고, 시더는 개잎갈나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삼나무와 비슷한 각종 침엽수를 말한다. 그래서 이 나무를 달리 ‘히말라야삼나무’로 부른다. 히말라야는 ‘눈’을 의미하는 히와 ‘산’을 의미하는 말라야의 합성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흰 산을 의미하는 히말라야에 사는 이 나무를 눈 소나무, 즉 ‘설송(雪松)’이라 부른다. 북한에서도 설송이라 부른다. 히말라야나 레바논 등지에서는 5천년 동안 살고 있는 개잎갈나무가 있다.
레바논 사람들은 이 나무를 아주 사랑한다. 레바논 사람들이 이 나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는 이 나라 국기에 들어 있는 나무가 개잎갈나무라는 사실을 알면 짐작할 수 있다. 2005년 2월, 라피크 알하리리 총리가 암살된 후, 시민들의 혁명이 성공하였다. 이 때 언론에서 레바논의 시민혁명을 ‘백향목 혁명’이라 불렀다. 백향목(柏香木)은 이 나무의 학명인 체드루스(Cedrus)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성경에는 이 나무가 힘·영광·평강을 상징하는 축복의 나무로 등장한다.
구약성서에 백향목에 대한 내용이 일흔 세 곳에 나타난다. 레바논의 산들은 백향목의 주요산지였음이 기록되어 있다(“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이사야 2:13).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과 궁궐을 건축하기 위해 레바논에서 많은 양의 백향목을 수입했다(“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사무엘하 5:11).
백향목은 종종 힘과 영광과 호화로움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시편》 80편 10절에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라고 표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상징하였고, 92편 12절에는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고 기록되어, 의인의 성장을 상징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백향목으로 지은 건물이 있으니, 바로 돈암장이다.
돈암장(서울. 성북구 동서문동 4가 103)이 건축적으로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이 궁궐 양식이라는 점이다. 돈암장을 지은 이는 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 고 배희한 씨다. 창덕궁 대조전을 지은 최원식 목수의 제자인 그는, 경복궁내 향원정을 수리했고, 한국의 집, 죽서루 등을 지었다. 그는 생전에 “돈암장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짜서 지은 목조건물”이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은 모두 백향목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제 서남교회는 교회설립 70주년을 맞아,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정2품 소나무의 제2세를 기르듯이, 우리 교회 마당에 우뚝 서 있는 백향목의 묘목을 찾아 이를 새롭게 키우는 양묘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회와 제직회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자태의 이 나무를, 자랑스러운 서남교회의 기념목으로 지정하고, 교회 설립 70주년을 맞는 해의 추수감사절에 아담한 설명문을 만들어 세우고, 온 교우들이 둘러서서 “서남교회의 나무”로 지정 선포 하였다. 자라나는 후세들과 교회 마당을 드나드는 많은 성도와 이웃들이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유서 깊은 서남교회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